1. 수면과 약물 대사의 교차점 — 간과 뇌에서 벌어지는 일
약물은 대부분 간에서 CYP450 효소군을 통해 대사되며, 이 과정은 수면-각성 리듬에 따라 달라진다. 연구에 따르면 CYP3A4, CYP2D6 같은 주요 효소의 발현은 밤낮에 따라 최대 2배 차이를 보인다 (Clinical Pharmacology & Therapeutics, 2011). 즉, 같은 용량의 약을 복용해도 수면 상태와 시간대에 따라 혈중 농도 곡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수면 부족은 교감신경 항진과 코르티솔 증가를 유발해 약물 청소율(clearance)을 낮추고, 반대로 부작용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약물-수면 상호작용은 단순한 부수 효과가 아니라, 치료 효과와 안전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2. 항우울제와 수면 구조 — 얕아지는 잠, 달라지는 꿈
항우울제는 대표적으로 수면 구조를 변화시킨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s)는 REM 수면을 억제하고, 입면 시간을 단축시키기도 하지만 꿈의 빈도와 생생함을 증가시킨다 (Journal of Clinical Psychiatry, 2000). 삼환계 항우울제(TCAs)는 강력한 항콜린 작용으로 인해 깊은 수면을 늘리지만, 동시에 아침 졸음을 유발한다. 반면 미르타자핀 같은 노르아드레날린-세로토닌 작용 약물은 깊은 수면(N3)을 증가시켜 불면증 동반 환자에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우울증 치료제”라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도 수면 효과가 약물별로 극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3. 진통제·항히스타민제 — 무심코 복용한 약이 숙면을 흔들다
진통제 중 오피오이드 계열은 호흡 억제와 함께 수면 무호흡을 악화시키고, REM 수면 억제로 인해 수면의 회복 기능을 떨어뜨린다 (Sleep Medicine Reviews, 2017). 반면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는 프로스타글란딘 억제로 멜라토닌 합성을 방해해 입면을 늦출 수 있다. 항히스타민제는 크게 1세대와 2세대로 나뉘는데, 1세대(예: 디펜히드라민)는 혈뇌장벽을 통과해 강한 진정 효과를 유발하며, 실제로 시판되는 수면 보조제의 주성분으로 쓰인다. 그러나 잔여 졸림과 인지 저하 같은 부작용도 흔하다. 반면 2세대 항히스타민제는 진정 효과가 약해 낮에는 안전하지만, 밤에 복용해도 수면 유도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약물과 수면 위생의 균형 잡기
약물은 수면을 돕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수면을 해칠 수도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하다.
- 투약 시간 최적화: 항우울제 중 각성 작용이 강한 약은 아침에, 진정 효과가 있는 약은 저녁에 복용한다.
- 수면 일지 기록: 약물 복용 전후 수면 시간을 기록해 개인 반응을 확인하고, 의료진과 공유한다.
- 비약물 요법 병행: 약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수면 위생(빛·온도·카페인 관리)과 인지행동치료(CBT-I)를 함께 적용한다.
- 의료진 상담 필수: 장기 복용 중인 항우울제·진통제·항히스타민제는 임의로 복용 시간을 바꾸지 말고, 반드시 전문의 조율을 받아야 한다.
결국 약물과 수면은 ‘양날의 검’이다. 적절히 활용하면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관리가 소홀하면 숙면을 빼앗을 수 있다. 숙면을 원하는 환자라면 약물 복용을 단순한 처방으로 보지 말고, 자신의 수면 패턴과 맞추는 전략적 관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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